계속. 계. 속 용. 속 용서하. 면서.
Keep. Keep. For. gi. Forgi. Forgiving. Myself.
Photography Series, 2025
그러니까, 그 날이 출국을 나흘 정도 앞 둔 날이었거든. 내가 10시간 넘게 비행을 해서 가야 하잖아? 물론 반 년 뒤에 돌아오는 일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멀리 떠나는 거고, 나는 그렇게 나가 살아보는 게 처음이니까 이것저것 막 준비하고 있던 때였단 말이야. 그 날 문득 사가야 할 게 생각나서 매장으로 가는 길이었어. 역 지나면 있는 거기. 대충 필요한 거 몇 개 사오고 돌아오는 길에 근처 카페에서 플리마켓을 하고 있는 거야. 나 그런 거 구경하는 거 좋아하니까 좀 둘러보고 있었지. 빈티지 옷, 도자기, 악세사리. 뭐 그런 거가 대부분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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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차고 있는 팔찌를 보여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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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이 파란 눈의 문양 펜던트가 달린 팔찌를 보게 된거야. 파란 눈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데… 어디서 그런 내용을 봤더라?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더라? 하고 눈으로는 계속 그 팔찌를 바라보며 손으로는 의미를 검색해봤어. 터키어로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 ’nazar’에서 유래한 ‘나자르’ 혹은 ‘악마의 눈’이라고 불린대. 터키, 그리스, 중동, 인도, 중앙아시아 같은 쪽에서 나쁜 시선, 부정적인 에너지를 막아주는 부적처럼 쓰인다더라고. 그래서 산 거야. 출국 길에, 그리고 현지에 도착해서 생길 만한 나쁜 일을 얘가 좀 막아줬으면 싶었어서. 그렇게 도착했어. 내 몸집만한 캐리어 한 개, 그보다 조금 작은 캐리어 한 개, 매일 메고 다니던 백팩 한 개를 내 몸 주위에 두른 채로. 비행기에서 내리고 입국수속을 하러 가는 길까지는 사실 뭐, 내가 아시아나 항공 타고 갔으니까. 대부분이 한국인이었고 다른 나라 아시아인 몇 명, 백인 몇 명. 이렇게 있었다? 근데 그거까지 끝나고 게이트를 딱 나서는데. … 백인이 왜 이렇게 많아? 제 3 세계, 뭐 그런 곳에 온 것 같더라. 사실 그들한테는 내가 외국인인 건데, 나한테는 그 사람들이 전부 외국인이니까 그냥 너무 낯설고. 외국이라는 단어, 외국인이라는 단어, 전부 갑자기 입에 잘 안 붙는 기분이 들어서.
외?
외국?
외국인?
foreigner?
아 백
시안? 인?
유
색 인 흑
종?
인?
라운?
브
아
시아?
eu
R ope?
아
메
리
카?
afri
ka?
혼자 단어를 계속 읖조려보면서. 그렇게 공항 밖으로 나갔어. 짐은 엄청나게 무거운데, 누가 훔쳐갈까봐 몸 옆에 딱 붙인 채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으면서 간 거야. 그리고 문이 열리는 순간, 바람이
/훅/
하고 들어오는 거야. 날카롭고 살짝 차가운 바람이 내 몸쪽으로 가볍고 단단하게 불어오는데 내 몸을 관통하는 것 같은 거지. 그리고 시야가 확 트이는데…
눈이 너무 아팠어.
빛이 너무 하얘서. 반 년 간 내가 이곳에서 생활하며 해나갈 것들이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빛이 새하얀 캔버스같이 느껴졌어. 그러니까 갑자기 확 무서워지더라고. 너무 막막하잖아. 아무것도 없는 백지 상태이니까. 한국에서의 나는 이미 다 큰 어른인데, 거기서는 갓 태어난 아기인 셈이었지. 택시는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계좌이체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건지, 어떤 행동이 무례한 거고 예의있는 건지 전혀 몰랐거든. 그래서 그냥 거기 털썩 주저앉았다? 몇 분 간 그냥 그러고 별안간 앉아있었어. 눈물이 나거나 그랬던 건 아닌데... 그냥 길이 막힌 느낌. 아니면 영원히 뚫려있는 것 같기도 하고. 동양인 여자애 하나가 길바닥에 오랜 시간 멍하니 앉아있는데, 그런데도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 거야. 나도 아무도 신경쓰이지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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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찌의 파란 눈 모양 펜던트를 가리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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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순간 이 파란 눈에 빛이 닿는 걸 보았지. 어찌됐건 얘가 나를 지켜줄 테니까 이곳에선 그냥 막 살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더라고. 그래서 그냥 그렇게 반 년 있다가 왔어. 나를 발음 어눌하고 문장 어색한 외국인이라고 바라보는 시선에 차라리 전부 놓아버리고 막 살다가.
그렇게 막 살고,
또 막 살고,
또 또 막 살고…
실수하고,
무례를 범해도
나는 외국인이니까, 자주 말 귀 못 알아듣고 내 뜻을 정확히 전달하지도 못 하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계속 계속 용서하면서.
계속.
계. 속 용.
속 용서하. 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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